으레 세밑이 되면 지나간 한 해를 되짚어 보고 또 다른 한 해를 잘 맞이하자는 ‘결의’ 비스므리한 걸 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처사촌댁에 인사가기’처럼 안 하면 안 될 거 같아 하긴 하는데, 왠지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같고, 거창한 계획 같은 걸 내놔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내키지 않는 연례행사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날은 코앞에 다가왔고 책상 앞에서 뭔가를 끄적거리며, 새로울 날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헛발질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먹다 남은 술에 식은 안주 꼴 되지 않으려고, ‘거지도 술 얻어먹는 날이 있을 거다’라는 신념으로 인사이트가 한 해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독자님들이 혹시 궁금해 하실지 몰라 회사 비밀을 하나 공개할까 합니다(아주 쬐금). 작년 한 해 저희 인사이트 책 중 가장 잘 나간 책을 일렬로 줄 세우면(줄 서는 거 갠적으론 증말 실치만서두~~) 이렇습니다.

  1.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
  2. 자바스크립트 완벽 가이드
  3. 소프트웨어, 누가 이렇게 개떡같이 만든 거야
  4. 실용주의 프로그래머
  5. 생각하는 프로그래밍

 

Monac 님도 이 포스트에서 밝히셨듯이 컴퓨터 분야, 그것도 전문서 분야는 파이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제일 많이 팔았다는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가 이제 한 3천 부 조금 넘게 나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책들의 판매도 뭐 대충 유추할 수 있으시리라 사료됩니다. 게다가 한 달에 한 권 꼴로 나간 책(EJB 디자인 패턴, 13권ㅋㅋ)까지 생각한다면 밥먹고 사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ㅠ;ㅠ

 

지난 한 해 동안 이책 저책 쫓아 다니며 느낀 점이 있는데, 책들의 개성은 그 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엄청난 무엇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나온 신간이 눈에 띄게 톡톡 튀는 제목과 묵직한 컨셉을 지니고 있다면 그 개성만큼의 값어치를 하겠죠.

 

하지만 비슷비슷한 내용에 그나물에 그밥 같은 주제들, 몰개성적이고 짝퉁스러운 책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세’ 같은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만 여기선 어떤 책이든 고유의 가치가 있다는 말과 그 가치가 발현된다라는 말은 차원을 달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누가 이렇게 개떡같이 만든 거야”의 경우, 기획 단계에서 발간 결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트레이드오프를 가능케 했던 자료들이 본격적인 번역 원고를 받아 보면서 완죤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는데, 이것은 저에게 일종의 사건이었습니다.

 

“재밌다. 사용성을 아주 쉽게 잘 설명했다.” 등등의 아마존 서평들에 낚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저자의 ‘좌충우돌 타법’에 혀를 내두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추천사를 써주신 블루문 님께서 이렇게 애정어린 악평(?)을 쓰셨겠습니까… 특히, 개발자를 사정없이 까대는 장에서는 띵!~~눈 앞에 별이 다 보이더군요. 인사이트가 피라미면 개발자는 강물인데, 그 강물을 맑게 하기는 커녕 분탕질 하는 꼴이 될 성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어찌어찌,,, 원고를 손보긴 했습니다만, 그 원판 불변의 법칙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더군요. 그리하여 그 기나긴 고난의 컨셉잡기(일명 쥐잡기) 모드로 진입하려는 순간, 이 책의 가치는 뭘까? 라는 생각을 잠깐(아주 잠깐)하고 바로 생긴 대로 가자!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저런 개떡 같은 제목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많은 개발자 분들이 하해(夏海)와 같은 마음으로 널리 받아주셔서 안도의 한숨을 쉬긴 했습니다만…(감솨~~ 꾸벅)

 

책 바깥 세상에 “불의한 세상은 영웅이 위로해 준다.”라는 말이 있다면, 책 안의 세상에는 “불쌍한 책은 편집자가 위로해 준다.”는 말이 있을 듯 합니다. (지금 막 지어 냈슴다. 맘에 안드시면 스낍!) 그래서 그 많은 책들이 본성적으로 지닌 미세한 가치를 알아보고 발현시키는 게 편집자의 몫이라면 몫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럼 불쌍한 편집자는 누가 위로해 주나요?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도 엄마가 필요했구나 라고 절규하던데,,,, 이 세밑, 저도 울부짖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편집자도 편집자가 필요하당~~~